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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註釋

‘미국 문학이 닻을 내린 곳’

에드거 앨런 포의 가장 핵심적인 작품

 

포의 가장 위대한 작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경탄할 만한 소설. ―샤를 보들레르

뛰어난 지성이 들려주는 남극 지역에 관한 한세기 전의 상상. ―H. G. 웰스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가 창비세계문학 58번으로 발간되었다. 주인공 아서 고든 핌이 청년 시절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 포와 출판사 편집자가 이야기 안팎을 넘나들며 허구와 실제를 입체적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난파와 선상반란, 식인 행위, 신대륙 발견 및 원주민과의 전투 등 서사적 흥미 요소와 당대 실제 탐험기의 논픽션적 요소, 그리고 이후 단편소설들에서 포의 작풍을 특징지은 음울한 세계관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으며, 근대인 포의 문학적 성찰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동시대에 보들레르의 번역으로 소개되어 프랑스에서 열렬한 찬사를 받기도 했으며, 허먼 멜빌, 헨리 제임스, 쥘 베른은 각자 자신의 작품에서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에 응답한 바 있다.

 

 

미완성작으로 오해되어온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서구 근대주의에 관한 선구적 성찰

 

“선과 악은 그렇게 엄밀하게 상대적이었다.”(158면)

 

미국 청년 아서 고든 핌은 친구를 따라 남태평양행 고래잡이배에 몰래 올랐다가 겪은 구사일생의 이야기를 후일담 형식으로 들려준다. 선상반란에 휘말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난파당해 동료들을 잃고 가까스로 구조된 뒤에도 핌은 남극에 대한 호기심으로 항해를 계속해 미지의 땅에서 낯선 부족을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포라는 작가의 권유로 이야기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해상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항해 지식, 그리고 위기 상황 속 인간의 행동과 감정, 의식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서술 과정에서 작가 포가 등장하기도 하고 출판사의 개입이 후기 형식으로 소설의 일부가 되며 복합적인 서사가 완성된다.

독특한 형식 때문에 이 작품은 한동안 미완성작으로 오해되어왔다. 원고를 교정하던 핌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마지막 두세 챕터를 상실했다는 결말부의 내용을 이유로 이 소설은 그간 단편소설가로서 포의 명성에 비해 저평가되어왔다. 현재는 이런 비평적 오해가 수정되어 이 역시 의도된 소설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주류 독법으로 확립되어 있으며, 작품이 지닌 주제의식과 문학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모험담의 형식을 빌려 서구의 근대주의적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다. 표면적으로는 모험소설 장르 특유의 서사, 즉 서구 ‘문명’의 시선으로 ‘야만적’인 문화를 ‘발견’하고 ‘정복’하는 서사를 취하지만, 모험의 주체인 서구인들 자신의 야만성과 비합리성, 비이성적 행동 등이 곳곳에 드러난다. 가령 핌은 항해의 치명적 위험성을 알고 난 후 모험에 더욱 이끌리고, 죽음의 고비에서 절대 금기인 죽는 상상을 참지 못하는 등 이상심리를 겪는다. 더욱이 ‘야만성’의 대명사인 식인 행위는 ‘야만인’으로 지칭되는 미지의 땅 주민들이 아니라 핌을 포함한 서구인 선원들 가운데서 벌어진다. 핌은 모든 비이성적 사건이 곧 야만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고 일갈한다. “이 명백한 무정함에 대해서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이 있거든 내가 그때 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본 다음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150면) 포는 이 작품에서 서구인의 편협한 시각을 비판하고 문명과 관습을 상대화하면서 모험소설의 전형성을 뛰어넘는다.

 

 

미국 문학의 개척자 에드거 앨런 포

여러 세대, 수많은 작가들이 빚진 상상력

 

“운무를 꿰뚫는 그의 눈과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의 귀를 우리의 게으른 눈, 먹어버린 귀와 비교할 수 있을까?” ―샤를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는 19세기 신생 미국의 문단 태동기에 활약한 작가이자 비평가이며 문학 편집자로서 20년가량의 길지 않은 문필 활동 기간에 50여편의 시와 70여편의 단편소설, 2편의 중편소설, 1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다수의 평론과 산문을 남겼다. 신고전주의를 극복하고 낭만주의를 혁신했으며,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고딕소설의 전통을 완성하고 영어권 추리소설을 창시했고, 유럽 문학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대에는 미국 주류 문단과의 불화로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했으나,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등 프랑스 문인들이 극찬하며 평가를 바로잡고자 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포의 문학적 위상은 더욱 회복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작가들이 포의 문학에 영향받고 응답해왔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의 경우 허먼 멜빌이 『모비 딕』(Moby-Dick; or, The Whale)에서 ‘흰색’과 관련한 반인종주의적 성찰을 이어받았고, 헨리 제임스는 『황금 주발』(The Golden Bowl)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 소설의 영향력을 언급했으며, 특히 쥘 베른은 이 작품의 속편 삼아 『극 지역의 신비』(Le Sphinx des glaces)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낭만주의의 혁신적 계승자로서 포는 비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을 합리주의적으로 탐구했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이후 단편소설들에서도 계속해서 변주되는 독특한 상상력과 정밀한 묘사, 그리고 근대적 지식의 허망함이라는 주제의식을 앞서서 종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다양한 양태의 죽음과 광기 같은 기괴한 소재를 취하면서도, 그것에 매혹되어 신비화하기보다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인의 시각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포는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에서 합리적 이성의 위치를 자문하고 불가해한 미지의 영역을 겸손한 태도로 대하며 근대주의를 성찰하는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은 환상적인 모험을 지극히 사실주의적으로 서술하면서도 포만의 독특한 시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 차례

 

서문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후기

 

작품해설/근대 수용과 극복에 대한 선구적 성찰

작가연보

발간사

 

 

책 속에서


“술병이 부서지며 나던 소리의 반향이 막 사라지자마자 누군가 삼등선실 쪽에서 낮지만 열렬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일이 일어나니 마음이 너무나 벅차서 나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발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내 친구가 나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나에게 오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극심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며 나는 방의 문 근처 궤짝 사이에서 소리를 내기 위해 헐떡이면서, 필사적인 노력 끝에 일어섰다.”(58면)

“나는 당장 나무조각을 배열할 수 없었고 혹시 동료 고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것을 뽑도록 속일 방법은 없을까 온갖 생각을 다 했다. 내 손에 있던 네개의 조각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뽑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 보전을 위해 죽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 명백한 무정함에 대해서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이 있거든 내가 그때 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본 다음에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150면)

“한점 보잘것없는 난파선에 실려 바람과 파도의 자비에 전적으로 맡겨진 채 떠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더 끔찍한 고난과 위험을 오로지 하느님의 가호 덕분에 방금 빠져나온 우리에게 그때 견뎌야 하는 것들은 거의 일상적인 악 이상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선과 악은 그렇게 엄밀하게 상대적이었다.”(158면)

“우리가 때마침 잡았던 그 새는 다소 질기기는 했지만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것은 바닷새가 아니라 새까맣고 회색이 도는 깃털을 한 해오라기과의 새로 크기에 비해서 날개가 작았다. 우리는 나중에 그 협곡 부근에서 같은 종류의 새를 세마리 보았는데 그 녀석들은 우리가 잡은 새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새들은 육지에 내려앉지 않았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246~47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상상력은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발동했고 더 끔찍하게 선명해졌다. 마침내 상상력에서 나온 위기, 비슷한 어느 경우라도 너무나 공포스럽게 닥치는 위기, 자신이 추락할 때 느낄 감정을 미리 느끼는 위기의 순간이 왔다. 자신이 머리부터 곤두박질칠 때 느껴질 구토증과 현기증과 마지막 몸부림과 가사 상태와 단말마의 고통을 상상해보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런 상상력 때문에 그 내용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상상한 모든 공포의 장면이 실제로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56~57면)

 

 

옮긴이의 말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서구 역사의 전개와 그 바탕에 있는 근대주의적인 사고에 대한 포의 성찰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작품이다. 인간, 특히 서양인의 합리주의와 그 문명이 자연과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개척, 정복,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 근대주의의 담론이라면, 이 작품은 그런 사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전승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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