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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중단편집
註釋

마흔네 살의 늦깎이 작가로 시작해 한 달 평균 200자 원고지 1000매, 총 10만여 매의 원고에 단행본 80여 권의 작품을 남긴 이병주의 문학은, 그 분량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강력한 대중 친화력을 촉발했다. 그와 같은 대중적 인기와 동시대 독자에의 수용은 한 시대의 ‘정신적 대부’로 불릴 만큼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 작가를 그 시대의 주요한 인물로 부상시키는 추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는 작가의 타계 이후 20년이 가까운 지금,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 진행되고 있는 작품의 대중적 수용 및 실용성, 곧 문화 산업의 활발한 추진과 더불어 다시 살펴보아야 할 면모를 여러 방면에서 촉발한다. 이병주 문학이 갖는 독특한 내용 및 구성은 이 대목에 있어 매우 효율적인 요인으로 기능하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재미, 박학다식과 박람강기, 체험의 역사성, 지역적 기반 등 여러 요소가 그의 문학 가운데 잠복해 있는 까닭에서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소설 <철학적 살인>, <겨울밤-어느 황제의 회상>, <예낭 풍물지>는 이병주의 작품 가운데서도 수발(秀拔)한 중·단편들이다. 세 작품은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발표되었으니,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18년, 그리고 데뷔한 지 7년째부터 쓴 것으로, 언론과 문학 양면에 걸쳐 뛰어난 문장가였던 그의 문필이 한결 유장해졌을 무렵이다. 뿐만 아니라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파란만장한 삶의 풍파가 세상살이의 문리(文理)를 틔워, 한 작가가 가장 의욕적으로 작품을 쓸 만한 지점에 도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소설은 이병주의 전체 작품 세계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며, 거기에 담긴 바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이야기들도 작가의 사상·체험·상상의 방대한 부피 중 미소한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단단한 세부들은 우리에게, 이 작가가 정녕 소중히 알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생각이 무엇이며, 그 생각의 통로를 되짚어 작가의 작품 한복판으로 진입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지시한다. 작가의 전체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역이 있는 만큼, 공들여 제작한 개별의 작품을 공들여 읽어야 할 영역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병주의 세계에는 그런 대표성을 가진 소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