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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은!이!
註釋

들어가는 말

  우주라는 광활한 큰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우리는. 인간이란 명제를 안고 살며 종국에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간다.인간은 자연이다. 인간은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고, 공기가 된다. 자연에서 났기에 한편으로 인간은 자연의 성질과 특성을 너무 잘 알고 또한 자연을 가장 잘 이용할 줄 안다. 아니, 자연을 자기의 성향에 맞추어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조립하고 끼어 맞추면서 가장 잘 착취 할 줄 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자연의 제왕 노릇 하면서 으시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퇴색되고 변형된 인간 자신의 유전자遺傳子(유전의 기본단위. 생식을 통해 유전되는 세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안에 아름다운 자연을 탐닉하고 즐기고자 하는 ‘에고’로 가득해져 그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대대손손 보전하며 물려주려고 하는 성향이 점점 희박해 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몸속에는 ‘방랑의 기질’ ‘역마살의 기질’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그렇다. 한 곳에 안주하며 살려고 하지 않는 그놈의 기질. ‘좀 더 나은 곳으로’ 향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은 지구라는 환경마저 손상시키고 급기야는 떠나려고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즉, 자기가 사는 집안에 오물과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보고, 깨끗한 집을 찾아 나서는 것이 효율적이고 더 잘 사는 길이라고 보며, 자연을 보호하고 소극적으로 사는 것보다 자연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정복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지구라는 큰 집마저도 옮기려 하니, 이제 더 옮겨갈 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년 생~,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이 “우리가 우주를 개발하게 되면 다시 옮겨갈 곳이 생겨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측을 내 놓은 것을 보면 지금 과학과 기술의 속도를 보면 머지않아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라고 한 스피노자(1632년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태어난 철학자.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삼는 17세기 유럽의 합리주의자 중 한 사람)의 말처럼, 나 또한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아름다운 지구를 떠나 이사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허나 지금은 풀벌레가 울어대고,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며, 계곡물 흐르는 산천이 있는 이러한 곳에서 살고 싶다. 아니 자연이 우리의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은 일생의 짧은 시간 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돌아 갈수 있는 곳이기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연을 보호하며, 존중하고, 환경보호를 하면서 살고 싶다. 자연이란 것이 사람의 인위적인 ‘에고’에 의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면 어떠한가. 천연 그대로 이지 않은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우주의 섭리에 의하여 순환되어지는 바로 그 자연.

우주라는 공간에서 태어난 모든 식물과 생물은 대자연이라는 ‘큰 집’에서 살다가 잠깐 떠났다가더라도 다시 그리워하며 그 품속으로 회귀 하지 않는가. 그 집안에 인간의 탐닉이 만들어낸 오물과 쓰레기만 없다면, 신비로운 꽃향기 맡는 정원과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정자에 둘러 앉아 가장 인간적이며 자연적인 삶을 향유하며 살지 않겠는가.

그 때 그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며 가족의 행복도 느끼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사, 이동 즉 ‘방랑의 기질’은 그 속에서 영원히 잠들 것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자연 속에서 자연인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며 삶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행복을 가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존재이다. 그러나 재앙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 존재 스스로가 가속적으로 불러와 곳곳을 오염시키며, 공해로 많은 생명의 터전인 강과 바다와 대지가 위협을 받고 있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기후 현상, 지진, 홍수 등의 이변은 여실히 인간 미래의 불행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훼손된 자연을 복구하고 청정한 자연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노력도 이어짐을 볼 때, 절망은 아직 이르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이제라도 자연은 ‘인간의 인위적인 조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다봄을 원한다’라는 것을 직시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라는 큰집에서 아직은 살고 싶다’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은, 우리들은, 이사할 필요성도 없이...,”

저자.김남열